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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나리봇짐
문화, 그리고 문화산업이 제대로 성장하려면 습지처럼 생태계가 잘 만들어져야 한다고 믿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메일은 botzzim@gmail.com, 트윗주소는 @timshel02, 페이스북은 www.fb.com/botzzim, www.fb.com/localstorytell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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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03 14:53 도시와스토리텔링

도시와 스토리텔링 연재(1)


지구상의 마지막 빙하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1만 3,000년 전에 끝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인류는 동굴과 임시 움막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나선다. 생존 방식도 크게 변했다. 내일을 기약하기 어려운 수렵과 채집 대신에 적당한 기후와 비옥한 토양을 갖춘 강가에서 미래를 위해 시간을 투자하는 농경기술을 개발한다. 인류는 드디어 ‘정착’하기 시작한 것이다.


조직전문가들은 이때부터 인류의 공동체가 정교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농경생활을 공유하던 촌락공동체의 규모는150명 선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50명은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보고 친밀감을 느끼는 한편, 공동체로서 응집력을 발휘할 수 있는 한계 숫자로 알려져 있다. 


이 숫자를 넘어갈 때 대개 공동체 안에서 반체제 세력이 등장하게 되고, 그 세력이 커지면 공동체가 둘로 나뉘던지 아니면 해체된다는 것이다(영국 옥스퍼드대의 인류학 교수인 로빈 던바(Robin Dunbar)가 발견했다 해서 ‘던바의 숫자’로도 불리는 150은 고대 로마의 백인대를 비롯해 현대사회의 교회 조직, 군대 조직에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지구는 사람이 살기 좋은 땅을 고르게 허락하지는 않았다. 빙하기가 막 끝난 시점에 아프리카를 제외하고 사람들이 모여 살만한 땅은 비옥한 초승달, 즉 메소포타미아 지역이 거의 유일했다. 나머지 땅은 얼음이 녹았어도 여전히 추웠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기에는 적당하지 않았다고 한다.


새로운 정주 모델, 도시를 발명하다


지금도 그렇지만 살기 좋은 곳에는 사람들이 모여들기 마련이다. 150명이 공동체의 적정 숫자라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숫자로 밀려드는 사람들을 억지로 막아내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래서 인류는 새로운 정주 형태를 발명한다. 바로 ‘도시’다.  


역사학자들은 인류 최초의 도시로 지금의 요르단 서안, 팔레스타인 지역에 있는 예리코(Jericho)를 꼽는다. 구약 성서에도 등장하는 이 예리코는 기원전 9,000년 정도에 형성되었다고 한다. 물론 이 기준은 다분히 유적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진 경우까지 합친다면 도시의 시작은 그 이전으로 더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예리코 발굴 유적(출처 : 위키피디아)


예리코를 신석기 시대의 촌락과 구별하여 도시로 규정하는 이유는 ‘성곽’ 때문이다. 건물터가 70여 개 발견됐고, 인구수는 약 1,000명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도시는 그때 이미 성벽과 성문, 망루를 갖추고 있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여리고성 함락 이야기가 기원전 16세기 정도이니, 그때 멸망했다손 치더라도 7,500년 가까이를 존속한 도시다.


고대인들이 도시를 만들면서 성곽을 쌓아올린 이유는 적정인구를 유지하고(무분별한 유입을 막고) 적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성곽은 도시가 가지고 있는 생산 능력을 지속하기 위한 하드웨어적인 해결책이었던 셈이다. 여기에 촌락으로는 불가능한, 도시만이 줄 수 있는 서비스가 가미됐을 것이다. 변덕스런 날씨를 차단하는 건물과 쉽게 이동할 수 있는 효율적인 도로, 위생환경을 획기적으로 개선한 치수시스템 등이 그렇다.


그러나 성곽과 하드웨어만으로 도시를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도시는 외부뿐만 아니라 내부의 문제도 만만찮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던바의 숫자 150명은 촌락의 숫자였다. 도시는 이 숫자를 크게 넘어선다. 적게는 수천에서 많게는 수십만명이 한 군데에 모여 살았다. 사람 숫자가 많아지면 공동체는 균열이 생길 수밖에 없다. 생판 모르는 사람들과 같은 장소에서 어울려 살아야 한다. 


예리코만 해도 던바 숫자보다 6.7배가 많은 인구가 살았다.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일곱 배나 많았다. 그런데도 도시라는 모델은 해체되지 않고 장기간 생존하는 데 성공했다. 왜 도시 사람들은 분열하지 않고 오랜 기간 동안 공존할 수 있었을까? 그 비결이 무엇일까? 


도시의 중심은 ‘이야기’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장 먼저 문명을 일궈낸 수메르인들의 도시에서 우리는 중요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수메르인들은 도시 중앙에 반드시 신전을 세웠다. 도시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상징이었다. 시간이 흐르며 규모도 커졌다. 방 한 칸에서 여러 칸으로 넓어졌고, 1층에서 여러 층으로 높아졌다. 1990년 걸프전 때 미군들이 군화발로 걸어오른 우르의 지구라트도 수메르인들이 달의 신 난나에게 바친 신전이었다.


인류 최초의 이야기로 평가 받는 길가메시 서사시도 수메르인들이 남긴 유적이다. 주인공 길가메시는 도시국가 우르크의 5대 왕으로 126년간 통치했다고 기록돼 있다. 서사시에는 길가메시가 인간 아버지와 여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영생을 꿈꾸는 존재로 등장한다. 길가메시가 우르크란 도시에 얼마나 비중이 있는 존재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우르크의 길가메시처럼 다른 도시에도 각자 모시는 신과 관련하여 유사한 이야기들이 존재했을 것이다.


신전과 이야기는 한 몸이었다. 이야기는 도시를 수호하는 신의 정체을 알려주었고, 신전은 그 이야기를 시민들에게 선포하고 제의를 올리는 곳이었다. 도시의 중심에 신전을 세웠다는 것은 도시의 중심이 바로 ‘이야기’라는 뜻이다. 이야기는 같은 도시에서 살아가는 서로 다른 사람들을 묶어주는 가상의 끈이었고, 다른 도시 사람들과는 구별 짓는 중요한 단서이기도 했다. 도시간의 전쟁은 신들의 전쟁, 즉 이야기 사이의 전쟁이기도 했다.


고대 수메르 도시인 우르의 신전 지구라트(출처 : 위키피디아)


이처럼 고대인들이 도시를 지으면서 이야기도 함께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생존’을 위해서였다. 지금 시각으로는 거대한 신전을 짓는 것이 엄청난 낭비로 보이겠지만, 당시에는 훌륭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도시와 그렇지 못한 도시간에 차이가 명확했다. 훌륭한 이야기는 곧 강한 신이었고, 강한 신은 곧 도시의 힘이었다. 훌륭한 이야기와 강한 신으로 도시전체를 하나로 묶어내는 곳과 그렇지 못한 곳이 맞부딪혔을 때를 상상해보자. 사기가 충만한 곳과 그렇지 못한 곳이 싸울 때 결과는 규모와 무관하게 명약관화하지 않던가.


도시의 이야기는 요즘처럼 도시의 장식품이 아니었다. 도시 공동체의 기원을 밝히고, 거기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성격과 행동을 규정하는 중요한 기준이었다. 시각적으로 보이는 신전과 거기서 행해지는 제의,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내러티브가 도시 사람들의 마음 속에 뿌리 내렸고, 그 정도에 따라 공동체의 운명도 좌우됐다. 왕들이 거대한 신전 만들고 화려한 제의를 수행하는 공을 들일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이야기 없는 도시는 죽은 도시나 마찬가지였다(계속).


* 이 글은 월간지 '피플파워'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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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괴나리봇짐 괴나리봇짐